[28화] 한일 동맹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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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부터 보기 ☞ 등장인물 소개 한국 정부가 사리엘을 전격 도입하는 바람에, 일본 정부도 물밑에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국뿐 아니라 일본에게도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19세기 이래 ‘단검’ 같은 존재였기에, 한국만 사리엘을 운용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쿄 이치가야 방위성 11층 접견실. 장관 비서가 소리 없이 다가와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찻잔 두 개를 테이블 중앙에 정확히 대칭으로 내려놓고 그림자 속으로 물러났다. 창밖 신주쿠의 마천루가 오후 햇살을 받아 유리벽에 희미하게 비쳤다. 방위장비청 장관 나카무라 켄타로는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 너머로 맞은편의 다치바나 슌스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본 유수 방산업체 시라카와 중공업 사장이었다. 방 안에 들리는 것은 메이지 시대부터 자리를 지켜온 낡은 탁상시계의 태엽 소리뿐이었다. 밖에서 언뜻 보면 방산 업체와 방위장비청은 유착 관계로 얽혀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둘의 관계를 현미경을 대고 살펴보면 실상은 조금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찌됐든 법규와 절차를 신성시하는 엘리트 관료에게 업자들의 탐욕은 ‘통제’해야 할 대상이기에, 둘 사이엔 관객이 없는 무대에서도 잘 짜인 연극처럼 날 선 대사가 오가곤 한다. “다치바나 사장, 사리엘 도입 계획을 논의하기에 앞서 한 마디만 짚고 가겠습니다.” 나카무라가 찻잔을 들지 않은 채 입을 뗐다. 그의 시선에는 희미한 경멸이 묻어났다. “방위 장비 조달에 있어 최우선 가치는 절차적 정당성입니다. 시라카와를 둘러싼 잡음에 대해 정부가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인지하고 계십니까?” 잡음.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종의 ‘길들이기’ 의식부터 먼저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우회적으로 표현했지만, 최근 북미 시장에서 불거진 입찰 비리 의혹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치바나 사장은 장관의 눈빛으로 읽어냈다. 일본 방산 업체들은 양차 대전을 거쳐 쌓은 우수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각종 내부 잡음으로 인해 벽에 부딪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다치바나는 긴 말 대신 짧게 목례했다. “송구합니다. 내부 조치를 통해 신뢰를 회복하는 중입니다. 조만간 이 오점을 덮을 확실한 성과로 보답하겠습니다.” “성과라.” 나카무라가 비서가 건넨 시라카와의 제안서를 집어 들었다. 표지를 넘기던 장관의 손가락이 세번째 페이지 제목에서 멈췄다. [미 7함대 신조함 건조 및 병참 기지화 계획(案)] “군함 건조?” 나카무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일본이 미국의 군함을 건조하겠다는 뜻인가요?” 업자들 마음대로 나라 정책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일종의 경고였을까. 다치바나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미국의 사리엘을 도입해주는 대신, 미 군함을 우리가 만들겠다고 역제안을 하는 겁니다.” “제목에서부터 도를 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정부가 기대한 건 미 정부 정책, RSF 범위 내의 지원이었습니다. 미군 군함을 고쳐주는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데, 신조함 건조라니.” 다치바나는 차분하게 찻잔을 들었다. 장관의 훈계를 참아낸 것은 이 순간 한 마디 피칭을 위해서였다. “장관님,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사리엘 도입을 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속내와 일치하고 있지만, 중요한건 미국이 먼저 우리에게 제안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역학관계를 냉정하게 계산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업체들도 MRO(정비∙수리) 정도에 만족하고 우리 정부 정책에 부응하겠다는데, 귀사는 굳이 미국 연방법으로 막혀 있는 선박 건조를 고집하는 논리가 뭡니까?" “MRO라는 게 말은 그럴싸해 보여도, 결국 미군 배 밑바닥에 붙은 따개비나 긁어내는 저부가가치 사업입니다. 영업이익률 10% 미만의 가욋일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업자들의 돈 얘기라는 거죠.” “시라카와가 사리엘 도입이라는 고비용 리스크 사업을 감수하겠다는 건, 고작 미 해군의 청소 용역을 따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면 뭡니까.” 나카무라가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공급망의 장악입니다.” 다치바나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배가 고장 나면 고치는 을(乙)이 아니라, 배가 부족할 때 공급하는 갑(甲)의 위치. 모항 지위를 가져오겠다는 겁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겠다는 이유가 뭐죠.” “미 해군 가동률은 60% 밑으로 떨어졌고, 자국 내 건조 능력은 중국의 20분의 1 수준입니다. 이건 팩트입니다. 우리 제안을 거절하기 쉽지 않을겁니다.” “미국이 용인할 리 없습니다. 자국 조선소 보호는 그들의 성역입니다.” “성역도 수급 불균형 앞에서는 무너집니다.” 다치바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렇게 무리한 제안을 했다가 양국 관계가 틀어질 수 있어요.” “법은 현실 앞에서 유연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겐 한 단어면 충분합니다. ‘민주주의의 병기창.’ 루즈벨트가 만든 이 단어는 워싱턴 정가에서 가장 효과적인 마케팅 키워드입니다.” 다치바나는 목을 곧게 세운 채로 시선을 보고서로 슬쩍 내렸다. 상사맨 출신답게 ‘돈이 되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였다. “영국이나 호주와 비슷한 방식으로 ‘일본 특별 예외 조항’을 적용받는 정공법으로도 충분해요. 꼼수가 아닙니다. 미국은 선택지가 없습니다. 일본의 도크를 빌리지 않으면 태평양 패권 유지가 불가능하니까요.” 탁상시계의 태엽 소리만 방을 채웠다. 다치바나가 말을 이었다. “방산은 수요가 멈추는 순간 죽습니다. 일본 자위대의 발주량만으로는 이 거대한 설비를 유지할 수 없어요. 미 7함대라는 물길을 도쿄로 유도해야 합니다. 시라카와의 도크를 24시간 쉼 없이 돌려야만, 일본은 과거 생산 능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비서가 조용히 다가와 식은 찻잔을 치우고 새 잔을 내려놓았다. 나카무라는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급변하는 안보 지형을 십분 활용하는 업자의 욕망을 모를 리 없었지만, 이를 외면하기엔 그럴듯한 논리를 갖추고 있었다. “......전문가 의견을 한 번 모아보시죠." 긍정도 부정도 아닌 관료의 원론적 대답이었다. 하지만 다치바나에게는 충분한 시그널이었다. 관료가 검토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는 것은, 명분만 만들어오면 승인하겠다는 뜻이었다. 에반이 풀어야 할 고차 방정식에 복잡한 변수가 하나 더 늘었다. 🎧 AI 성우들의 명연기를 음성으로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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