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완벽한 타이밍
![[31화] 완벽한 타이밍](https://www.chosun.com/resizer/v2/KRYVKQREIFBRTGEKWPON4MQK2Y.png?auth=2df1a516e6b015fecb65d0fa6b27851404d0a71262c9c9e5ae70371e0d5b772b&smart=true&width=2560&height=1440)
☞ 1화부터 보기 ☞ 등장인물 소개 필리핀 전시회가 끝난 지 보름쯤 흐른 날이었다. 북한 요원 김동성은 마닐라 GCI 사무실 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때? 필요한 건 좀 건졌어요?” 미셸이 탄산수 잔을 흔들며 다가왔다. 김동성은 미셸의 말을 못 들은 척 타이핑을 이어갔다. 무언가 제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김동성의 태도가 썩 마음에 안 든 다는듯 썩소를 지으며, 그의 의자 뒤로 다가와 굳어 있는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세르펜티 팔찌의 금속이 그의 목선에 닿았다. 김동성은 낯선 감각 탓에 어깨가 살짝 굳어 버렸다. 미셸은 개의치 않고 그의 뭉친 근육을 따라 엄지로 천천히 원을 그렸다. 그러더니 그의 목덜미와 볼에 1초 간격으로 각각 두 번씩 키스를 했다. 귓가에 숨결이 느껴질 수 있도록. 김동성은 제멋대로 빳빳해진 아랫도리를 빤히 바라봤다. 미셸은 숨이 가팔라진 그의 가슴을 따라 오른손을 그의 배꼽 아래로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일하는 중입니다. 손 치우세요” “라이, 메이꽌시, 라이” 미셸은 익숙하다는 듯 그의 허리춤의 단추를 풀려는 순간, 김동성이 미셸의 손을 탁 쳐내면서 벌떡 일어섰다. “일단, 충전 케이블로 심은 백도어 덕분에 하드웨어 제어권은 잡았어요.” 미셸은 그제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모니터 옆에 놓여 있던 충전 케이블을 집어 만지작거렸다. 그의 부풀어오른 바지춤을 바라보며. “재미없는 남자네. 긴장 좀 풀어주려 했는데” 미셸이 집어 든 것은 마닐라 전시회장에서 에반에게 빌려줬던 충전 케이블이었다. 주스 재킹. ( * 공항, 카페 등 공공장소에 설치된 무료 USB 충전 포트를 통해 스마트폰의 개인 정보를 탈취하거나 악성코드를 설치하는 해킹 수법) 스마트폰 커널 층으로 파고든 맬웨어는, 에반이 애지중지하는 스마트폰의 핵심부까지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맬웨어가 도달한 커널 레벨에서는 OS가 사용자의 고막을 보호하기 위해 걸어놓은 볼륨 리미터, 화면 밝기 상한, 진동 모터의 출력 제한 같은 소프트웨어 안전장치가 모두 무의미해진다. DAC에 직접 명령을 보내면 스피커 드라이버가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출력을 밀어붙일 수 있고, 사용자의 화면에는 아무런 변화도 표시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에반의 스마트폰을 원격 조종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요, 그럼 안에 있는 기밀 정보도 한 번 접근해보지 그래요?” 김동성이 고개를 저었다. 기밀 데이터는 별도의 암호화 계층에 숨겨 놨고, 듀다엘의 보안팀이 설계한 그 벽은 커널 권한으로도 뚫을 수 없었다. “데이터는 못 빼요. 암호화 키가 1분마다 갱신돼.” “그럼 우린 정확히 뭘 할 수 있어요?” “기기 자체는 우리 거야. 화면 밝기, 진동 모터, 오디오 출력... 뭐 이정도를 하드웨어가 낼 수 있는 최대치까지 마음대로 올릴 수 있어요." 미셸이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화면을 가리켰다. “에반 윤이 지금 그 전화기로 뭘 하고 있어요?” “이메일이나 메신저는 보안 앱이라 접근 불가하고... 지금 실행 중인 건 스포티파이뿐이네요. 음악을 듣고 있고,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 연결된 상태고." 노이즈 캔슬링, 외부 소리를 차단하고 귓속에 밀착하는 구조다. 평소에는 편안함을 주는 기능이지만, 리미터가 풀린 최대 출력이 그 밀폐 공간 안에서 터진다면? 미셸은 세르펜티 팔찌를 매만지며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기회는 딱 한 번이라는 뜻이네.” 같은 시각. 도쿄 토라노몬. 야근을 마친 에반은 듀다엘 재팬에서 리스해 준 검은색 아우디 A8의 운전석에 앉았다. 쿵. 도어가 닫히자 바깥세상이 차단됐다. 독일제 세단 특유의 밀폐감이 느껴졌다. 시동 버튼을 누르자 8기통 엔진이 부드럽게 깨어나며 대시보드의 앰비언트 라이트가 푸른빛으로 실내를 감쌌다. 유달리 힘든 하루였다. 본사의 재촉부터 일본 지사 직원들의 은근한 견제까지, 그리고 이리나와의 말다툼까지. 에반은 새벽 6시에 출근해, 밤 9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퇴근길에 나섰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세상의 소음을 지우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고 싶었다. 음량 바를 절반 언저리까지 올렸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액셀을 밟았다. 차체가 토라노몬의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쿄의 밤거리로 합류했다. 수도고속도로 램프의 짧은 가속 구간을 지나 C1 도심환상선 본선에 올라붙었다. 빌딩 숲 사이를 구불구불 관통하는 이 도로는 운전자들에겐 악명 높지만, 동시에 도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내주는 구간이었다. 계기판의 바늘이 제한 속도의 두 배를 향해 올라갔다.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을 짓이었다. 차선 폭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가는 정도였고, 갓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로 이음새를 넘을 때마다 ‘타닥, 타닥’ 하는 규칙적인 진동이 핸들을 통해 올라왔다. 오른쪽으로 롯폰기 힐즈의 실루엣, 왼쪽으로 도쿄 타워의 붉은 철골이 빠르게 스쳐갔다.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빌딩 사이 불빛이 에반의 스트레스를 녹이는 듯했다. 이어폰에서 캘빈 해리스의 비트가 흐르기 시작했다. 전주의 신디사이저가 창밖의 네온과 겹쳤다. 에반은 비트에 맞춰 고개를 까닥였다. 오른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왼손으로 이리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Evan: 방금 퇴근했어. 금방 갈게.] 환상선을 빠져나와 바다 쪽 지선으로 갈아탔다. 창고와 고가 구조물이 양옆에서 시야를 좁혔다. 노면이 들리기 시작했다. 벽처럼 서 있던 구조물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전방의 세계가 통째로 열렸다. 검은 도쿄만 위로 레인보우 브릿지가 하얗게 빛났다. 문제는 그 직전이었다. 다리로 올라붙는 구간은 해수면 50미터 위까지 차체를 밀어 올리는 급경사 좌선회다. 시야가 갑자기 트이면서 속도 감각이 무뎌지고, 바다에서 올라온 바람이 차체를 옆으로 민다. 비트가 고조됐다. 전방 200m. 콘크리트 방호벽 아래로 시커먼 물이 내려다보였다. 존 뉴먼의 보컬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았다. 에반은 핸들을 쥐고 코너의 정점을 향해 차체를 기울였다. 완벽한 타이밍, 완벽한 속도, 완벽한 음악. 모든 것이 통제 하에 있다고 느낀 바로 그 순간. 마닐라. 에반의 GPS 점이 급커브의 정점에 도달했다. 미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야. 최대치로 올려.” 키이이이이익—— 이어폰 음량이 폭발했다. 단순히 볼륨이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OS의 리미터가 사라진 상태에서 DAC가 스피커 드라이버에 모든 걸 쏟아 부은 날것의 출력이었다. 노이즈 캔슬링이 외부 소리를 모두 차단한 귓속 밀폐 공간에서, 에반은 순식간에 덫에 걸려버렸다. 🎧 AI 성우들의 명연기를 음성으로 들어보세요.
This is a summary. Read the full article at the original source.
Read full article at chosu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