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그라드 고원에 핀 ‘대리석의 기적’, 성 사바 성당의 비밀

베오그라드 고원에 핀 대리석의 기적, 성 사바 성당의 비밀 동유럽의 심장 베오그라드의 성 사바 대성당 백대리석 대성당, 지하 7m 밑 황금 바다
‘동유럽의 심장’이라 불리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그 중심부인 브라차르(Vračar) 고원에 서면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백대리석 외관의 ‘성 사바 대성당(Church of Saint Sava)’이 시선을 압도한다. 높이 79m에 달하는 이 웅장한 건축물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정교회 성당 중 하나다. 세르비아 정교회(Serbian Orthodox Church)는 전 세계 동방 정교회 중 하나로, 러시아 정교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슬라브계 정교회다. 사바(Saint Sava·1174~1236) 성인은 세르비아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이자 민족의 성인이다. 본명은 ‘라스트코 네마니치(Rastko Nemanjić)’로,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를 창건한 국왕 스테판 네마냐의 셋째 아들(왕자)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와 권력이 보장된 왕자의 삶을 버리고 그리스 아토스산으로 떠나 수도사가 되었고, 이때 ‘사바’라는 법명을 얻었다. 사바 성인은 당시 그리스 정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던 세르비아 교회를 독립시켜 1219년 최초의 세르비아 자치 정교회를 세우고, 스스로 첫 번째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단순한 종교인을 넘어 세르비아 최초의 법전을 편찬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문학을 발전시켰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세르비아에서는 ‘교육과 문화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사바 성인의 업적을 기려 만든 이 거대한 성당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지상이 아닌, 발밑 7m 아래에 숨겨져 있다. 지상의 소음을 뒤로하고 서늘한 석조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순간, 땅 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거짓말처럼 펼쳐진다. 지하 대성당(Crypt)의 문을 열자마자 관람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발걸음을 멈췄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어두컴컴한 지하 무덤이 아닌, 눈이 멀 것만 같은 ‘황금의 바다’ 같았다. 아주 특별한 이름이 있다. 비잔틴 예술의 정수 : 수백만 개의 황금빛 무라노(유리) 유리 타일과 천연 원석이 천장과 벽면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정교하게 설치된 조명이 황금빛 표면에 반사되어 지하 공간 전체가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신비로운 천장화 : 지하 성당 중앙 돔에는 거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자이크화인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그리스도)’가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캔버스에 먼저 성화를 그린 뒤 천장에 붙이는 독특한 방식으로 완성된 것으로, 황금빛 배경과 정교회 고유의 푸른빛, 붉은빛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성스러움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 지하 성당이 이토록 화려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세르비아인들의 무수한 눈물과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성당이 지어진 브라차르 고원에는 세르비아 역사상 가장 비장한 이야기가 묻혀 있다. 1594년, 오스만튀르키예 제국의 지배에 저항해 세르비아인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 오스만튀르키예 사령관 사난 파샤는 이들의 정신적 지주를 없애버리기 위해 성 사바의 유해를 파헤쳐 이 고원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렸다. 오스만튀르키예 제국은 이 사건 이후 독립 의지마저 재가 되어 사라질 거라 믿었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오히려 “성자의 재가 베오그라드 하늘로 날아가 이 땅 전체를 축복했다“고 믿었다. 그로부터 300년 뒤, 성자의 유해가 불탄 바로 그 자리에 민족의 영혼을 세우자며 건립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성 사바 성당이다. 건립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1935년에 야심 차게 착공했으나 2차 세계대전과 공산 정권 시절, 코소보 전쟁 등을 거치며 폭격을 맞고 공사가 수십 년간 중단됐다. 1941년 나치 독일군이 베오그라드를 점령했을 때는 뼈대만 겨우 올라가 있던 성당 내부를 군용 차량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수모를 겪었고, 전쟁 후 유고슬라비아 공산 정권 역시 이 신성한 공간을 여러 기업의 화물 창고로 방치했다. 민족의 성지는 수십 년간 매연과 먼지, 화물 상자로 가득 차 있었던 암흑기였다. 지상 성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세르비아인들은 바로 이 지하 대성당에 모여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리며 민족의 비극을 견뎌냈다. 탄압의 불길 속에서 부활한 성전인 셈이다. 이 화려한 지하 성당은 놀랍게도 중세의 전통 비잔틴 양식을 고수하면서 현대적인 조명 기술을 접목해,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내부 장식이 최종 완공됐다. 성 사바 성당의 건축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는 1989년에 일어났다. 성당의 상징인 4000톤 무게의 거대한 중앙 돔을 얹는 작업이었다. 당시 기술로는 그 높은 곳에 돔을 직접 짓는 것이 불가능하자, 엔지니어들은 성당 내부 바닥에서 돔을 완벽하게 다 지은 뒤 유압식 잭(jack)을 이용해 밀어 올리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하루에 고작 2.5m씩, 무려 40일 동안 밀리미터(mm) 단위의 사투를 벌인 끝에 4000톤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공중 부양하듯 떠올라 제자리에 안착했다. 베오그라드 시민들은 매일 성당 주변에 모여 이 기적을 숨죽여 지켜보았고, 안착하던 날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지하 대성당의 공식 명칭은 ‘성 왕자 라자르 지하 예배당’이다. 라자르 왕은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튀르키예 제국의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성군이다. 전투 전날 밤 천사가 나타나 지상의 승리와 하늘의 순교 중 무엇을 택할지 묻자, “지상의 왕국은 일시적이지만, 하늘의 왕국은 영원하다”며 순교를 선택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지하 성당 내부에는 이 비장한 코소보 전투 일화가 정교한 프레스코화로 새겨져 엄숙함을 더하며, 역대 세르비아 정교회 총대주교들의 묘역이 함께 마련돼 있다. 이곳의 또 다른 묘미는 ‘침묵’과 ‘소리’에 있다. 대리석과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마감된 덕분에 지상의 차량 소음이나 웅성거림이 완벽히 차단된다.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으면 어디선가 나지막한 정교회 성가가 울려 퍼진다. 악기를 쓰지 않고 오직 인간의 목소리(아카펠라)로만 찬양을 하는 정교회 전통과, 지하 성당 특유의 돔 구조가 만나 완벽한 울림통 역할을 한다. 반주 없는 목소리가 벽을 타고 온몸을 감싸 안을 때면, 종교가 없는 이조차 경건함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현지에서 만난 한 세르비아인 관람객은 필자에게 “지상 성당이 세르비아의 힘과 웅장함을 보여준다면, 지하 대성당은 우리 민족의 영혼과 슬픔, 그리고 신앙을 담고 있다”고 속삭였다. 성 사바 대성당의 진면목을 보려면 지상 성당 내부를 통해 지하(Crypt)로 내려가는 안내판을 따라가면 된다. 입장료는 무료다. 세르비아의 성지이자 종교 시설이라 노출이 심한 옷(민소매, 짧은 반바지 등)은 입장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에 복장에 유의해야 한다. 베오그라드에 간다면 이 위대한 보물을 꼭 눈과 마음에 담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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