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 수집한 '모범경찰'의 실체... 청와대서 이런 말까지

20일 국무회의에서 훈장·포장·표창 198점에 대한 취소가 의결됐다. 12·12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 계엄 수행, 간첩 조작 등으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 등을 받은 167명에 대한 국가의 재평가가 이뤄졌다. 서훈이 취소된 대상자 중에는 고문경찰 이근안을 끌어준 박처원(1927~2008)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도 있다.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대한민국 상훈' 사이트에 따르면, 박종철 고문치사의 은폐를 주도한 박처원이 받은 상훈은 홍조근정훈장·화랑무공훈장·보국훈장·대통령표창을 포함해 총 열세 개다. 이게 다는 아니다. 사이트에 공개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40여 개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도가 지난 3월 30일에 있었다. 수상 횟수에서도 나타나듯이, 공안경찰의 대부인 박처원은 가장 모범적인 경찰공무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런 인물에 대한 대한민국의 평가가 이번에 바뀌게 됐다. 그런데 그가 받은 모든 상훈이 다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21일 보도에 따르면, 경찰청 관계자는 공안조작이나 인권침해와 관련된 상훈만 취소된다고 언급했다. 장기근속 등을 포함한 여타의 사유로 수여된 상훈은 제외된다는 설명이다. 박처원의 조작 기술 박처원의 출생지는 평안남도 진남포다. 그가 월남한 것은 아버지의 친일 경력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직후에 아버지가 이북에서 체포된 뒤 남하했다고 한다. 38도선을 넘은 그는 경찰 양성기관을 거쳐 스무 살 때인 1947년에 서울 종로경찰서 사찰계 순경이 됐다. 미군정 하의 종로경찰서 사찰계는 일제강점기의 종로경찰서 고등계와 비슷했다. 1940년 2월 27일 자 <조선일보>는 "평양 모모(某某) 중등학교 졸업생 중 불온사상단체가 잇다 하여 작년 가을부터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검거·취조"했다고 보도했다. 해방 이전의 고등계도 불온분자를 수사했고, 이후의 사찰계도 불온분자를 수사했다. 해방 이전의 불온분자는 주로 항일운동가들이었다. 미군정기의 불온분자는 그중에서도 반미적인 항일운동가들이었다. 항일세력이 미군정의 경제정책 실패와 친일청산 지연 등에 불만을 품고 저항하자, 미군정은 이들을 불순세력으로 분류했다. 범위가 다소 달라지긴 했지만, 사찰계가 수사한 대상은 고등계가 수사한 대상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일제와 미군정에 의해 불온분자로 간주된 세력과 그 계승자들은 그 뒤 통일과 민주주의를 외쳤다. 대한민국 시기의 사찰계는 이들을 감시 대상에 포함했다. 해방 이전의 고등계와 이후의 사찰계가 똑같다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기능상의 연속성이 존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전체 내용보기
▲고 박종철군 관련 항소심 공판에서 박처원 전 치안감이 법정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 1988.3.4 연합뉴스 박처원의 출생지는 평안남도 진남포다. 그가 월남한 것은 아버지의 친일 경력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직후에 아버지가 이북에서 체포된 뒤 남하했다고 한다. 38도선을 넘은 그는 경찰 양성기관을 거쳐 스무 살 때인 1947년에 서울 종로경찰서 사찰계 순경이 됐다. 미군정 하의 종로경찰서 사찰계는 일제강점기의 종로경찰서 고등계와 비슷했다. 1940년 2월 27일 자 <조선일보>는 "평양 모모(某某) 중등학교 졸업생 중 불온사상단체가 잇다 하여 작년 가을부터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검거·취조"했다고 보도했다. 해방 이전의 고등계도 불온분자를 수사했고, 이후의 사찰계도 불온분자를 수사했다. 해방 이전의 불온분자는 주로 항일운동가들이었다. 미군정기의 불온분자는 그중에서도 반미적인 항일운동가들이었다. 항일세력이 미군정의 경제정책 실패와 친일청산 지연 등에 불만을 품고 저항하자, 미군정은 이들을 불순세력으로 분류했다. 범위가 다소 달라지긴 했지만, 사찰계가 수사한 대상은 고등계가 수사한 대상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일제와 미군정에 의해 불온분자로 간주된 세력과 그 계승자들은 그 뒤 통일과 민주주의를 외쳤다. 대한민국 시기의 사찰계는 이들을 감시 대상에 포함했다. 해방 이전의 고등계와 이후의 사찰계가 똑같다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기능상의 연속성이 존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위 보도에서 나타나듯이 박처원의 고향과 가까운 평양의 청년들은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종로경찰서 고등계에까지 끌려갔다. 그들보다 조금 어린 박처원은 그로부터 얼마 뒤 종로경찰서 사찰계에 들어갔다. 언론인 겸 학자였던 리영희(1929~2010)의 <대화>에 따르면, 박처원은 1983년에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온 리영희에게 "17살 때 평양에서 반소(련)운동을 했고 남조선에 내려와서 종로경찰서에 들어가 빨갱이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경찰 대공과를 지망했고 밑바닥에서부터 30년 동안 일해왔다"라며 자기 사연을 들려줬다. 일제강점기의 '빨갱이'는 반제국주의 성향의 항일 인물이었다. 해방으로부터 불과 2년 뒤인 1947년 당시의 '빨갱이'도 기본적으로 그런 사람이었다. 항일 구호가 친일청산 구호로 바뀌고 분단반대 등을 주장하는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그 2년 사이에 전혀 다른 유형의 빨갱이들이 한반도에 대거 유입된 것은 아니다. 이는 1947년에 빨갱이를 잡겠다며 사찰계 경찰을 자원한 박처원의 행동 저변에 항일투사들에 대한 반감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박처원은 빨갱이를 잡겠다는 1947년 당시의 일념으로 30년 동안 일했노라고 스스로 말한 일이 있다. 그가 해방 직후의 항일투사들과 해방 이후의 민주화운동가·통일운동가를 비슷한 부류로 인식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런 인물이 훈장을 최소 13개, 최대 40여 개나 받은 것은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를 어지럽히는 일이다. 종로경찰서에서 순경으로 시작한 박처원은 박정희 후반기인 1976년 이후에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장'이 됐다. 경찰의 공안수사를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던 것이다. 그런 뒤인 1986년에 지금의 경찰청에 해당하는 치안본부의 제5차장이 됐다. 순경에서 시작해 치안본부 차장이 됐으니,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뛰어다녔으리라는 점이 인정된다. 그러나 좋은 의미의 부지런함은 아니었다. 그가 어떤 일을 해서 경찰 상부의 인정을 받았는지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1948년 8·15 정부수립 이후의 정국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이런 속에서 국회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출범시키고 친일청산을 주도했다. 이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승만 정권이 벌인 공안 조작이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국회의원들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프락치로 몰아붙여 국회의 기를 꺾고 친일청산 중단 등을 정당화하려 했다. 박처원은 이 수사에도 참여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2018년에 펴낸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는 박처원의 프로필을 제시하는 대목에서 "국회 프락치사건 등 수사"를 예시한다. 박처원은 진실을 밝혀내는 경찰이 아니라 꾸며내는 경찰이었다. 그가 사건 조작에 능하다는 점은 1977년의 리영희 필화 사건 때도 증명됐다. 리영희가 중국 사회를 소개한 <8억인과의 대화> 등을 펴낸 일이 '중공 찬양·고무'로 왜곡돼 그해 11월 23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것은 박처원의 조작 기술 때문이었다. 위의 <대화>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학자가 책을 펴낸 일을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도 리영희는 남영동에 끌려간 뒤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1983년에 리영희를 다시 만난 박처원은 자신이 중앙정보부를 꺾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노라며 1977년 일을 자랑삼아 말했다. 중앙정보부의 반대를 무력화시키고자 직접 청와대를 찾아갔다는 것이 박처원의 말이다. 박처원이 청와대에 가서 이런 말을 했다고 <대화>는 들려준다. "리영희를 이번 기회에 유죄 판결하고 뽄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사상통제를 할 수 없다. 그리고 내 부하들이 조서를 꾸밀 수가 없다. 여하간 법률적인 것과 관계없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유죄판결 내려야 하고 징역을 살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유사한 일들이 앞으로 나오면 반공법 위반으로 때려잡도록 전례를 남겨야 한다." 이근안을 밀어준 박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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