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한 美사령관 “한국 포병 승진 대상없어”... 백선엽 “못미더우면 시험보자” 역제안

단호한 美사령관 한국 포병 승진 대상없어... 백선엽 못미더우면 시험보자 역제안 절실했던 포병 지휘관 승진안 깐깐한 미8군 사령관은 반대 역제안으로 곤경을 돌파하다
6·25전쟁의 흐름은 점차 휴전(休戰)을 향하고 있었다. 1953년 3월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의 죽음을 계기로 서방과 공산 진영 모두 휴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태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전선에 부임한 맥스웰 테일러 신임 미8군 사령관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 전반을 관리하면서 사태를 확전으로 몰고 갈 것인지, 아니면 휴전과 종결로 이끌 것인지, 미국 행정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소개했듯 뛰어난 군정가(軍政家)의 자질을 갖춘 지휘관이었다. 치열한 야전 지휘에 대한 열망보다는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전장의 현실에 접목해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능한 인물이었다. 미 행정부는 바로 그런 군정가형 사령관을 한국 전선에 보내 머지않아 닥칠 휴전 국면을 빈틈없이 관리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백선엽은 휴전 분위기가 짙어질수록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 북진(北進)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휴전에 맹렬히 반대하고 있었다. 한국 대통령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 없는 백선엽이었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단독 북진’을 고수하면서 미군과의 마찰을 키울 수도 없었다. 미군과의 협력 관계가 무너지면 한국군의 전력 증강과 현대화도 사실상 포기해야 할 처지였다. 따라서 1953년 초 백선엽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고도의 조정 능력이었다. 양극단 사이에 선 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도 큰 낭패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북진 과정에서 허망하게 무너졌던 2군단의 재창설은 ‘한국군 현대화’의 첫걸음이었다. 이미 소개했듯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백선엽이 책임지고 완수한 과업이었다. 그 핵심은 포병 전력의 증강과 현대화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당시 한국군에는 상하 계급 간 권위의식이 유난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사단마다 1개 대대 정도씩 배속된 포병 화력의 운용도 이 때문에 자주 문제를 빚었다. 당시 포병사령관은 주로 중령이나 대령이 맡았다. 반면 사단장은 준장이나 소장이었다. 장군 계급인 사단장은 포병사령관을 하급 지휘관처럼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다. “이쪽으로 와서 포를 쏘라”며 포병 부대를 임의로 이동시키기도 했다. 계급 차이에서 비롯된 권위주의가 크게 작용했다. 정밀한 좌표를 활용하면 포병 부대는 굳이 진지를 옮길 필요가 없었다. 어느 위치에서든 좌표에 따라 사각(射角)과 사거리(射距離)를 조정해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현대 포병 운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단장들은 포병을 마음대로 부리려 했다. 백선엽은 참모총장으로서 이 문제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는 참모총장에 취임한 직후 관련 건의를 받아들여 포병사령관 16명을 준장으로 진급시키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그해 말 테일러가 신임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백선엽의 지시에 따라 준장 진급 대상에 오른 포병사령관 16명을 비롯해 중령급 장교까지 포함한 포병 지휘관 30명은 소토고미의 한국군 2군단에서 교육받은 뒤 미 제5포병단에서 실전 훈련을 거쳐 각 사단에 배치된 상태였다. 냉정하고 까다로워 전임 밴 플리트 사령관과는 성향이 크게 달랐던 테일러는 이 방안에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단순히 ‘미온적’이었다기보다 젊은 한국 육군참모총장과 기 싸움 또는 신경전을 벌이는 양상에 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테일러 사령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한다. “상의할 일이 있으니 동숭동 사령부로 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조용하면서도 깐깐한 인상의 맥스웰 테일러는 집무실을 찾아온 한국 육군참모총장 백선엽에게 통보하듯 말했다고 한다. “장군 진급 계획안을 자세히 살펴봤는데, 나는 이 안에 동의할 수 없다.” 테일러는 이어 자신의 반대 이유를 설명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포병은 단기간에 양성할 수 있는 병과가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전문성을 쌓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기간에 대규모 진급을 추진하는 것은 무리다. 포병은 평생 배워도 다 익히기 어려운 분야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한국군은 이번 계획을 철회하는 것이 좋겠다.” 6·25전쟁 발발 직후 한국군은 작전 지휘권을 미국에 넘겼다. 이듬해 현리 전투에서 한국군 3군단이 허망하게 붕괴한 뒤에는 한국군이 자체적으로 운용하던 군단 병력에 대한 지휘권마저 사실상 상실했다. 따라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미군의 영향력은 한국군에 절대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군의 모든 권한까지 미군에 넘긴 것은 아니었다. 포병사령관의 진급은 한국군이 보유한 인사권에 해당했다. 이런 권한의 행사까지 미군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테일러의 반대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작전 전반을 지휘하는 미군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구도를 만드는 것도 곤란했다. ‘승부사’ 기질을 지닌 백선엽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테일러의 다소 긴 반대 설명을 들은 뒤 역제안(逆提案)을 내놓았다고 한다. 먼저 한국군 장교에 대한 인사권은 한국군 참모총장인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완곡하게 밝혔다. 이어 이렇게 제안했다. “이미 선발해 진급 대상에 올린 지휘관들은 모두 능력이 뛰어납니다. 이들과 직접 면담하거나 시험을 치르게 한 뒤 판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테일러로서도 백선엽의 제안을 무작정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전쟁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수많은 한국군 병력을 원활하게 지휘하려면 한국군의 수장(首長)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테일러는 마지못한 듯 배석해 있던 미 군사고문단장 라이언 소장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귀관이 나를 대신해 백 총장과 함께 포병 장교들을 면담한 뒤, 그 결과를 내게 보고하라.”
This is a summary. Read the full article at the original source.
Read full article at chosu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