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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악 만연하던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기억, 《시크릿 에이전트》

해악 만연하던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기억, 《시크릿 에이전트》

사회 문화의 중요한 배경인 시스템을 인식하고 저항의 방식을 탐색하는 것이 ‘정치적’이라고 한다면, 《시크릿 에이전트》는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듯한 방식으로 정치적 의제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동시에 그 사이에서 가장 강렬하게 탐구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성 그리고 세대를 이어가는 기억의 전승이다. 1977년 브라질, 영화의 자막처럼 ‘해악이 만연하던 시대’의 풍경 안에는 단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위협받던 사람들이 있다.폭력의 망각에 저항하기브라질 동북부의 항구도시 헤시피로 향하는 길, 마르셀루(바그너 모라)가 차

한 국가와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 어떻게 들췄나 사회 문화의 중요한 배경인 시스템을 인식하고 저항의 방식을 탐색하는 것이 ‘정치적’이라고 한다면, 《시크릿 에이전트》는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듯한 방식으로 정치적 의제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동시에 그 사이에서 가장 강렬하게 탐구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성 그리고 세대를 이어가는 기억의 전승이다. 1977년 브라질, 영화의 자막처럼 ‘해악이 만연하던 시대’의 풍경 안에는 단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위협받던 사람들이 있다. ADVERTISEMENT 폭력의 망각에 저항하기 브라질 동북부의 항구도시 헤시피로 향하는 길, 마르셀루(바그너 모라)가 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른다. 앞마당에는 종이로 얼굴만 겨우 덮어놓은 시체 한 구가 부패 중이다. 근무 중이던 직원이 침입한 강도를 죽인 뒤 경찰에 신고했지만 출동하지 않는다는 게 주인의 설명이다. 이윽고 경찰들이 나타나지만 그들은 사건 조사차 온 것이 아니다. 시체에는 눈길만 잠시 줄 뿐, 마르셀루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데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한창 진행 중인 도시의 카니발을 후원하라는 명목이다. ADVERTISEMENT 상황은 마르셀루가 돈 대신 담배를 건네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찐득한 땀이 느껴질 것 같은 화면의 질감 안에서, 영화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브라질의 공기를 관객의 코앞에 들이민다. 폭력은 어떻게 유지되며 사람들은 그것을 얼마나 냉소적이고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이곳은 이유 없는 죽음이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장소다. 짐짓 은밀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주인공 마르셀루는 특정 기관에 복무하는 요원이 아니다. 다른 이의 자유를 위해서, 혹은 그에 준하는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자기의 삶과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학자라는 처지가 마르셀루가 일종의 요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저항가들이 여럿 모여 임시 거처로 삼는 헤시피의 안전가옥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신분을 숨기고 국가 신분증 기록 보관소에서 일한다. 그곳에서 어머니의 생존을 증명할 증거를 찾는 것은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들을 피해 어린 아들과 브라질을 뜨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과업이다. 영화의 배경인 1977년은 브라질의 21년 군사독재 시대의 한복판이다. 2019~23년 강경 보수주의 성향인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당선되면서 브라질에서는 과거의 기억들이 영화로써 소환되기 시작했다. 《시크릿 에이전트》가 제작된 시기에 민주주의가 위협받거나 역사의 일부가 은폐되는 이야기, 기억의 재발견 같은 소재의 영화가 여럿 등장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 국제무대에 선보인 발터 살레스 감독의 《아임 스틸 히어》는 1970년대 정권하에서 남편을 잃었지만 이후 자신과 가족의 삶으로써 투쟁을 지속하고 역사의 증인으로 남은 유니스 파이바의 실화를 다뤘다. 브라질의 국가폭력이 개인과 가족을 해체한 과정과 폭력의 망각 앞에서 투쟁을 이어온 유니스 가족의 시간을 통해 기억과 기록의 메시지를 힘 있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나란하다. 《시크릿 에이전트》를 연출한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은 자이르 보우소나루 정권을 비판하면서 우파 진영의 표적이 된 인물이다. 마르셀루를 연기한 배우 바그너 모라 또한 2019년 브라질의 혁명가 카를로스 마리겔라의 삶을 다룬 《마리겔라》로 연출 데뷔를 치른 이후 보우소나루 정부의 박해를 받아야 했다. 멘돈사 필류 감독이 영화 평론가였던 시절부터 이어졌던 느슨하고도 긴 우정, 브라질 북동부 지역 출신이라는 유대감, 정치적 입장에 따른 박해와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연대적 동지애는 영화의 중요한 출발점인 셈이다. 매력적이고 자유로운 연출, 또렷한 성찰 시대 배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정치적 시선을 견지하고 여러 장르를 자유롭고 대범하게 넘나드는 《시크릿 에이전트》는 ‘라틴아메리카 버전의 쿠엔틴 타란티노’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역사적 사건과 시대 풍경을 가져오면서 당시 대중문화를 풍성하게 경유해 주인공의 여정을 바라보는 방식이 특히 닮아있다. 주유소의 상황을 다룬 오프닝으로부터 영화가 건네는 강렬한 예감은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내내 지속되는 카니발의 열기는 민주적이고 거대한 축제인 동시에 공포정치를 감추기 위한 기만적 방편이다. 사람들은 신문에서 최소 100명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한다. 이는 광란을 틈타 자연스럽게 실종되거나 처리된 사람들의 숫자다. 한낮의 맥주, 경쾌한 음악, 흥겨운 카니발. 편집 전체에서 어수선한 듯 자유로운 감각을 유지하면서 영화는 마르셀루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유롭게 넘나든다. 그중 영화 《죠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며 브라질의 관객들 또한 열광하던 시기, 상어 배 속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다리가 발견된 상황은 《시크릿 에이전트》를 지탱하는 중요한 서브플롯이다. 깊이 가라앉아 있던 진실의 상징과도 같은 그 다리는 마르셀루와도 깊이 연관된 부패한 경찰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분주히 움직이도록 만든다. 영화 중반에 돌연 펼쳐지는 일명 ‘털북숭이 다리’ 시퀀스도 당혹스러우리만큼 흥미로운 대목이다. 밤마다 사람들을 공격하는 외다리를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구현한 이 시퀀스는 당시 헤시피에 존재했던 도시의 전설이다. 실제로는 한밤중에 공원에서 대마초를 피우는 사람이나 동성애자들을 경찰이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사건을 의미하는 일종의 암호이자 정부 검열에 시달리던 기자들이 내놓은 방편이었다. ‘털북숭이 다리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접하면, 사람들은 권력과 관련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 “브라질은 불쾌한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것을 택한 국가다.” 멘돈사 필류 감독의 말이다. 그는 이에 저항하듯 《시크릿 에이전트》를 통해 한 국가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경험하고 지니고 있는 집단적 기억을 들춘다. 영화의 진의가 드러나는 순간은,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던 마르셀루의 이야기가 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기록 보관소의 자료들을 녹취하는 한 젊은 여성이 파악하는 역사였음이 밝혀질 때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현재가 지금 시점에는 모두가 과거가 되어버린 이야기다. 마르셀루가 동지들을 만나 가짜 여권을 구한 뒤 나라를 떠나는 것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때의 음성 기록도 마찬가지다. 즉 이 영화 전체는 미래 시점에서 누군가가 복기하고 재구성하는 상황이며, 이는 과거를 통한 성찰을 표방하는 행위 그 자체다. 기록은 미완의 임무로 남거나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던 이들의 과거를 미래의 기억으로 가져간다. “이 아이들은 해악이 덜한 브라질에서 자랄 거야.”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안전가옥의 밤, 잠든 아이의 얼굴로부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근심이 잠시 사라진다. 우리 모두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위에 서있다는 또렷한 실감이 장면의 여운으로 남는다.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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