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이승만 평전]을 써야 했는가 <저자 심양섭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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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이승만 평전』을 썼는가좌파의 낙인을 걷어내고, 건국 대통령의 ‘사투’를 복원하기 위하여 심양섭 | 정치학 박사·『이승만 평전』 저자 이승만 재평가는 영화 한 편이 만든 유행이 아니다. 1990년대 말 학문적 문제제기에서 시작해 노무현 정부 시기 보수 시민운동, 뉴라이트와 교과서포럼, 보수 출판운동을 거쳐 〈건국전쟁〉의 117만 관객으로 이어진 20여 년의 역사투...
- 왜 나는 『이승만 평전』을 썼는가 좌파의 낙인을 걷어내고, 건국 대통령의 ‘사투’를 복원하기 위하여심양섭 | 정치학 박사·『이승만 평전』 저자 이승만 재평가는 영화 한 편이 만든 유행이 아니다. 1990년대 말 학문적 문제제기에서 시작해 노무현 정부 시기 보수 시민운동, 뉴라이트와 교과서포럼, 보수 출판운동을 거쳐 〈건국전쟁〉의 117만 관객으로 이어진 20여 년의 역사투쟁이요, 역사전쟁이다. 이승만 재평가가 2024년의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에서 갑자기 시작됐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앞에 놓인 20여 년의 지적·시민운동을 놓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씨앗은 1990년대 말에 뿌려졌고, 2002년 대선과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대중적 보수운동으로 폭발했다. 보수는 거리에서 시작해 역사와 교과서로 진군했다 2003년 3·1절 서울시청 앞에서는 북한 핵개발과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고 한미동맹과 자유통일을 외치는 대규모 국민대회가 열렸다. 2004년에는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학법 개정 등을 포함한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을 ‘4대 악법’이라 부르며 보수 진영이 장외투쟁에 나섰다. 평생 시위라고는 모르고 살았던 교수, 예비역 장성, 전직 고위공무원, 기업인과 교회 장로·권사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아스팔트로 쏟아져 나왔다. 한국 보수는 그때 비로소 선거 때 표만 던지는 침묵의 다수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공개적으로 지키는 시민세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거리의 각성은 곧 사상의 재정비로 이어졌다. 1998년 전향한 주사파 출신 지식인들이 창간한 『시대정신』은 자유주의와 북한 인권, 대한민국 정통성의 언어를 벼렸고, 2004년 자유주의연대, 2005년 교과서포럼과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잇달아 출범했다. 교과서포럼은 ‘대한민국은 실패한 역사가 아니라 성공한 역사’라는 문제의식을 내걸고 기존 근현대사 교과서의 좌편향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기파랑을 비롯한 보수 출판사들은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다시 읽는 책을 쏟아냈고, 2008년에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출간되었다. 〈건국전쟁〉의 117만 관객은 이 긴 흐름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학자와 저술가, 출판인과 시민, 목회자와 평신도가 20여 년 동안 물을 대고 가꾼 토양 위에서 비로소 가능했던 문화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흥행했다고 해서 오래된 프레임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내가 출석하는 우리들교회의 김양재 목사님은 수요 오전예배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이승만”이라고 말씀하셨고, 청년부 수련회에서도 청년들이 잘못 배운 이승만 인식을 교정하려고 강의형 설교를 하셨다. 또 소그룹 리더와 부리더들에게 〈건국전쟁〉을 보아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런데 일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왜 그런 영화를 봐야 하느냐”고 반발했다. 이 일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조차 이승만은 여전히 ‘친일·분단·독재’의 세 단어로 봉인돼 있었다. 영화 한 편으로는 부족했다. 더 길고, 더 정확하고, 더 설득력 있는 평전이 필요했다. 김일영 교수가 남기고 간 미완의 숙제 나에게 이 책은 학문적 기획이기 전에 스승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었다. 나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였던 고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2008년 나에게 박사학위를 준 이듬해인 2009년, 간암으로 마흔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치학자였지만 스스로를 역사가라고 여겼다. 수입된 이론을 한국 현실 위에 얹는 데 그치지 않고, 사료에 뿌리내린 ‘역사 있는 정치학’을 하려 했다. 김일영은 이승만을 무조건 찬양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는 역사가였다. 농지개혁의 혁명성을 밝히면서도 부산정치파동에서 권위주의의 대두를 읽어냈고, 북진통일론과 반일정책의 진정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국내정치와 정권 유지에 어떻게 활용됐는지 분석했다. 『건국과 부국』과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 「전시정치의 재조명」, 「이승만정부에서의 국내정치」는 이승만 시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다시 읽기 위한 좌표였다. 김일영 교수가 다 하지 못하고 간 일은 후학인 나에게 오래도록 짐으로 남았다. 나는 그의 책과 논문을 다시 읽었다. 유영익 교수의 저서와 이승만 서한집, 로버트 올리버가 쓴 전기와 이승만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읽었다. 그런데 교보문고나 예스24에서 ‘이승만 평전’을 검색하면 가장 눈에 띄는 책은 김삼웅의 『이승만 평전』이었다. 그 책의 부제는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였다. 보수우파가 이승만을 말하는 논문과 논설은 많았지만, 그의 90년 생애를 독립운동에서 건국, 전쟁, 동맹, 전후 재건과 하야까지 하나의 서사로 꿰어 낸 본격 평전은 여전히 부족했다. 그래서 내가 쓰기로 했다. 이승만의 일생을 관통한 한 단어 ‘사투’ 『우남 이승만 평전』의 저자인 이택선은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외국과의 협상에서도, 국내 정치인들과의 권력투쟁에서도 카리스마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승만, 그의 사투의 흔적은 고스란히 역사가 되었다.” 그렇다. 이승만의 삶은 사투였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투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해 워싱턴의 닫힌 문을 수십 년 동안 두드렸다. 태평양전쟁 전에는 일본의 미국 공격을 경고했고, 해방 뒤에는 소련과 김일성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전에 자유민주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사투했다. 6·25 남침으로 나라가 무너질 위기에서는 유엔군을 붙잡고 국군을 재건하기 위해 사투했으며, 정전이 분단의 영구 고착으로 끝나지 않도록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미국에게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내기 위해 목숨을 건 승부를 벌였다. 이승만의 강한 자의식과 카리스마를 개인적 권력의지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쉽고, 그래서 너무 얕다. 그가 상대했던 것은 이미 완성된 민주국가의 야당이 아니라 식민지에서 갓 풀려난 취약국가, 북한의 전체주의 독재와 소련·중국의 팽창, 그리고 자국의 이해에 따라 한국을 버릴 수도 있었던 강대국들이었다. 이승만은 품위 있게 패배하는 지도자보다, 욕을 먹더라도 나라를 남기는 지도자가 되기를 택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학정으로부터 구출해낸 모세와도 같은 ‘메시아’로서의 소명의식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농지개혁은 자유민주주의가 이룬 토지혁명이었다 내 평전의 첫 번째 핵심 주장은 농지개혁이다. 1940년대 후반 남한 인구의 약 70.9%가 농민이었고, 그 가운데 80% 이상이 소작농 또는 자소작농이었다. 토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지주과두제 국가가 되거나 공산혁명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좌파 역사학은 이승만이 지주세력을 등에 업고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김성호·박종철·신병식·김일영 등의 실증연구는 이 통설을 무너뜨렸다. 농지개혁은 이승만의 명령 한 줄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좌파식 무상몰수·무상분배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제헌헌법과 국회의 입법, 유상매수·유상분배라는 헌정 절차를 통해 추진됐다. 1950년 4월부터 분배예정통지서가 발송됐고, 6·25전쟁 이전에 이미 분배 대상 농지의 70~80%가량이 농민에게 넘어갔다. 동기는 복합적이었고 과정은 절충적이었지만, 결과는 혁명적이었다. 농지개혁은 지주계급의 정치·사회적 지배력을 해체하고 소작농을 자영농으로 바꾸었다. 북한의 토지혁명 선전을 무력화했으며, 농민에게 ‘지켜야 할 내 땅’과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해관계를 만들어 주었다. 훗날 근대화의 견인차인 발전국가가 등장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도 여기에서 생겼다. 박정희가 산업화의 엔진을 힘차게 돌렸다면, 이승만은 농지개혁과 의무교육으로 그 엔진이 달릴 길과 인적 연료를 준비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사회혁명 가운데 하나는 공산혁명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헌정 절차로 수행한 토지혁명이었다. 한미동맹은 미국에 순종해서가 아니라 미국을 붙잡아서 얻어냈다 두 번째 핵심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승만을 ‘미국의 앞잡이’로 규정하는 좌파의 친미 프레임은 사료 앞에서 무너진다. 그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미국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 정전협정이 통일도 안전보장도 없이 대한민국을 전선에 홀로 남겨 두는 사형집행영장과 같다고 판단하자, 1953년 6월 18일 약 2만7천 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미국은 격분했고 이승만을 통제하거나 제거하는 비상계획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그 위험한 승부수 뒤에 미국은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장기 경제원조, 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나섰다. 1953년 10월 1일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자동개입 조항을 담지는 못했지만, 미군의 한국 주둔과 양국의 제도적 군사동맹을 가능하게 했다. 종이 위의 조약과 현장의 미군 주둔이 결합하면서 북한의 재남침은 곧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하게 됐다. 이승만이 얻은 것은 단지 군사원조가 아니었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공장을 돌리고 제도를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진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한미동맹이 제공한 안보의 우산 아래에서 가능했다. 미국의 지시대로 움직인 지도자였다면 미국이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그가 물러나기를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이승만은 친미 하수인이 아니라, 미국을 이용하고 압박해 대한민국의 생존장치를 만든 동맹의 설계자였다. 부산정치파동은 전쟁과 건국의 구조 속에서 보아야 한다 세 번째 핵심은 부산정치파동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다. 1952년 비상계엄 아래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헌병대로 끌어다가, 정치적 압박 속에서 발췌개헌을 관철한 방식은 합법적이었지만 정당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사건을 ‘독재자 이승만이 민주국회를 짓밟은 일’로만 가르치는 것은 절름발이 역사관이다. 당시에는 6·25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수도는 부산으로 옮겨져 있었다. 대통령과 국회 다수파는 서로 다른 개헌안을 내놓고 권력구조를 둘러싼 사활적 투쟁을 벌였다. 국회 다수파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무력화하려 했고, 이승만은 국민 직선제를 통해 국회가 쥐고 있던 대통령의 선출권을 국민에게 돌리려 했다. 직선제라는 목표에는 민주적 실질이 있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동원한 계엄과 강압적 수단은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했다. 목표의 민주성과 수단의 비민주성이 한 사건 안에 동시에 존재했다. 더 넓은 비교사의 창도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신생국 가운데 인도처럼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나라는 극히 드물다. 시대와 조건은 다르지만 케말 파샤의 터키, 장제스의 대만, 나세르의 이집트처럼 국가 건설과 전쟁, 체제 경쟁을 겪은 나라에서는 강한 지도자와 권위주의 정치가 흔히 나타났다. 남한은 더구나 김일성의 일당독재와 6·25 남침, 전후에도 계속된 군사적 위협에 직면했다. 북한의 전체주의와 군사적 팽창이 남한 정치에 가한 압력을 빼고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개인의 권력의지로만 설명하는 것은 분단국가의 절반만 보는 일이다. 이승만의 말년의 과오가 독립운동과 건국, 농지개혁과 교육혁명, 전쟁 지도와 동맹 건설이라는 공적을 모두 소각할 수는 없다. 과를 말하되 공과의 역사적 비중을 뒤집지 않는 것, 이것이 보수우파가 지켜야 할 시시비비의 역사관이다. 이제까지 이승만의 과는 청동에 새겨졌고, 이승만의 공은 물로 씌어졌다. 이제 이승만, 그의 이름이 청동에 새겨질 날이 다가왔다. 북진통일과 반일노선은 신념이면서 전략이었다 네 번째 핵심은 북진통일과 반일노선의 국내정치적 성격이다. 김일영 교수의 탁월함은 이 두 정책을 ‘진심이냐 선동이냐’라는 단순한 양자택일로 보지 않은 데 있다. 정치지도자의 정책은 신념인 동시에 협상의 지렛대이며, 국민을 결집시키는 정치적 자원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자유통일을 진심으로 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총칼로 얻지 못한 것을 협상장에서 순순히 내놓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실제로 정전 뒤 열린 제네바 정치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그러나 북진통일론은 군사전략만이 아니었다. 분단의 영구 고착을 거부한다는 국가 목표를 분명히 하고, 미국을 압박해 안전보장과 군사원조를 얻으며, 전쟁에 지친 국민을 자유통일의 명분 아래 결집시키는 외교·국내정치의 복합 전략이었다. 결국 한미상호방위조약 제1조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규정해 이승만 자신의 단독 북진 가능성도 묶었다. 북진을 외친 지도자가 북진을 봉인하는 조약에 서명했다는 역설은, 그의 구호가 무모한 전쟁 선동만이 아니라 협상전략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반일노선도 마찬가지다. 이승만은 1941년 『일본내막기』를 출간해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을 경고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평화선을 선포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려는 미국의 구상에 맞섰으며, 한일 국교정상화보다 안전보장과 불가침을 먼저 요구했다. 그의 반일은 뿌리 깊은 신념이었다. 동시에 반일정책은 국내의 민족주의 여론을 결집하고 미국을 압박하며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정치적 자원으로도 활용됐다.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 그 신념의 진정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능한 지도자는 국민의 역사적 감정과 국가의 외교적 이익을 하나의 전략으로 묶는다. 195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발전국가의 맹아기였다 다섯 번째 핵심은 1950년대의 재평가다. 좌파 역사서술은 이 시기를 부패와 원조 의존, 독재만 남은 불임의 시대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농지개혁과 의무교육, 시장경제 제도의 정비와 초기 산업정책을 함께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1954~1959년 제조업은 빠르게 성장했고, 수출입링크제와 보호관세 등 1960년대 산업화 정책의 초기 형태도 1950년대에 나타났다. 무엇보다 교육혁명은 결정적이었다. 초등의무교육과 문맹퇴치로 취학률은 1950년대 말 96%를 넘어섰고, 비문해율은 급격히 떨어졌다. 농지개혁이 국민에게 소유의 기반을 주었다면, 의무교육은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놓았다.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는 어느 날 갑자기 무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공장의 기계를 다룰 노동자, 수출서류를 작성할 사무원, 기술을 익힐 학생을 길러낸 이승만 시대의 인적자본 위에서 출발했다. 건국과 부국은 단절이 아니라 바통터치였다. 나라가 서야 사람도 선다 내가 이승만을 다시 읽는 까닭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왜 태어나야 했고, 왜 지켜져야 했는지를 다음 세대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다. 1948년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화국 정신을 영토와 국민, 헌법과 정부를 갖춘 현실국가로 완성한 건국혁명의 해였다. 그 체제 선택의 결과는 오늘 남북한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이승만은 ‘분단’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체제’를 선택했다. 그것이 오늘날 남북한의 극명한 차이를 낳았다. 나는 오랫동안 북한을 떠나온 이들과 그 자녀들을 교육하고 섬겨 왔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존재는 교과서 속 추상명사가 아니다. 목숨을 걸고 건너온 자유의 땅이며, 다시 학교에 다니고 직업을 얻고 신앙을 지킬 수 있게 해 준 실재의 나라다. 해방과 전쟁 전후에 북녘을 떠난 천만 실향민, 그리고 오늘의 3만4천 탈북민은 공산독재가 아닌 자유의 나라를 선택한 것이다. 이승만 재평가의 마지막 근거는 이념의 도식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들의 얼굴이다. 대만과 체코, 미국을 보아도 국가지도자를 대하는 성숙한 태도는 기념과 비판을 함께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이제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기념할 수 있어야 한다. 부산정치파동과 3·15 부정선거를 가르치되, 그보다 앞서 독립운동 50년과 건국, 농지개혁, 교육혁명, 전쟁의 지도, 한미동맹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 과를 청동에 새기고 공을 물에 써 온 역사교육은 공정하지 않다. 김일영 교수는 미완의 뜻을 남기고 너무 일찍 떠났다. 나는 그가 열어 놓은 비교사와 시시비비의 길을 따라 이 책을 썼다. 스승이 다 하지 못한 일을 제자가 조금이라도 잇고 싶었다. 좌파의 악마화로 지워진 건국 대통령의 전신상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다. 그의 과오를 지우지 않되, 그의 공을 다시는 물로 쓰지 않기 위해서다. 이승만의 투쟁은 사투였고, 그 사투가 대한민국이라는 역사로 남았다.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첫걸음은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을 제대로 읽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그래서 『이승만 평전』을 썼다. 이승만을 알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필자 소개 | 심양섭은 정치학 박사로, 고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탈북청소년 기독대안교육 현장에서 사역해 왔으며, 『이승만 평전』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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