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이 숨어서 가족들과 밥먹던 곳... 식민지 홍콩의 역사 품은 지미스 키친

이소룡이 숨어서 가족들과 밥먹던 곳 식민지 홍콩의 역사 품은 지미스 키친 홍콩 100년 식당 9 지미스 키친 1924년에 오픈, 태평양 전쟁도 이겨낸 식당 할리우드 전설들이 사랑한 단골집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많은 식당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홍콩에서도 오랫동안 사랑받는 노포(老鋪)들이 있습니다. ‘홍콩 100년 식당’ 아홉 번째는 홍콩의 100년 영욕을 함께한 ‘지미스 키친’입니다. 홍콩 센트럴 상업지구 중심부 고풍스러운 아치형 창문의 석조 건물 페더 빌딩(Peddar Building)에는 올해로 102주년을 맞은 레스토랑 ‘지미스 키친(Jimmy’s Kitchen)’이 있다. 홍콩 사람들에게 단순히 오래된 맛집이 아니다. 이곳은 지난 100여 년간 홍콩이 겪은 영광과 비극의 순간들을 함께해왔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손자로 이어지는 추억이 깃든 공간이자, 대영제국의 식민지로서 태평양전쟁과 번영이라는 홍콩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견뎌낸 산증인이자 문화유산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임대료 폭등을 견디지 못하고 폐업하며 홍콩 주민들에게 안타깝게 했지만, 창업 100주년을 맞은 2024년 화려하게 돌아왔다. 식민지 시대 식문화 유산과 모던 다이닝이 정교하게 결합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지미스 키친의 이야기는 1924년 ‘동양의 파리’라 불리던 상하이의 황푸강 포구에서 출발한다. 미국 해군 퇴역 장교이자 수석 조리사였던 지미 제임스는 상하이 선창가에 미국·영국 해군 장교들과 서양 상인들을 위한 작은 바 겸 식당을 열었다. 서양식 집밥이 그리웠던 이방인들에게 금세 이곳은 안식처이자 사교의 허브로 자리 잡았다.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 이민자 애런 랜다우(Landau)는 지미스 키친의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봤다. 오스만 제국과 인도, 방콕을 거쳐 상하이에 정착한 랜다우는 제임스와 손잡고 식당을 본격적으로 확장시켰다. 랜다우는 1928년 서양 물류 거점으로 급부상하던 홍콩으로 눈을 돌렸고, 지미스 키친을 홍콩으로 옮겼다. 처음 문을 연 곳은 완차이였다. 당시 홍콩에는 서양 음식을 제대로 내는 식당이 드물었다. 지미스 키친이 선보인 고품격 요리는 영국 총독부 관료들과 서구 무역상사 임원들, 항구에 정박한 해군 장교들을 사로잡았다. 1930년대 지미스 키친은 센트럴 중심가인 시어터 레인(Theatre Lane)의 옛 차이나 빌딩으로 자리를 옮겼고, 홍콩을 대표하는 최고급 다이닝 레스토랑으로 자리 잡았다. 지미스 키친은 유럽 요리에 동양 향신료와 러시아 등 다양한 지역 조리법을 절묘하게 섞으며 이른바 ‘컬로니얼 컴포트 푸드(Colonial Comfort Food)’라는, 오늘날 퓨전 요리라 불릴 만한 독보적 요리 장르를 개척했다. 지미스 키친의 100년 역사가 항상 평탄한 비단길은 아니었다. 1941년 12월 25일, 홍콩이 일본군에 침략당해 함락된 이른바 ‘검은 크리스마스(Black Christmas)’가 닥쳤다. 애런 랜다우의 아들이자 2대 오너였던 레오 랜다우는 영국 국적이 아니었지만 자신의 고향인 홍콩을 지키고자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일본군에 붙잡혔다. 그는 구룡반도의 악명 높은 삼수이포 포로수용소에 3년 반 동안 수감됐다. 기아와 질병 속에서도 레오 랜다우는 수용소 주방에서 혹독한 시간을 버텨냈다. 하지만 아들 알렉산더가 홍콩 거리에서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 생존해 돌아온 레오는 폐허가 된 홍콩에서 지미스 키친의 문을 다시 열었다. 식량난과 물자 부족 속에서도 레오는 아시아 각지에서 구해온 재료로 홍콩 시민들과 연합군 군인들에게 훌륭한 식사를 내놓았다. 많은 홍콩 사람들에게 지미스 키친의 부활은 단순한 식당 영업 재개를 넘어, 홍콩이 비극을 딛고 다시 일어섰음을 알리는 희망의 신호탄이었다. 전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지미스 키친은 황금기를 맞았다. 동서양 문화가 교차하는 홍콩의 독특한 위상 덕분에 지미스 키친은 세계적인 정치·경제·문화계 유명 인사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사교장이 됐다. 찰리 채플린, 프랭크 시나트라, 오손 웰스, 캐리 그랜트, 존 웨인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할리우드 거장들이 단골을 자처했다. 홍콩이 낳은 전설적인 액션 스타 이소룡(Bruce Lee)도 언론의 눈을 피해 지미스 키친의 구석진 코너 테이블에서 가족과 조용한 식사를 즐기곤 했다. 지미스 키친에 얽힌 수많은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건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 ‘모정(慕情·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 촬영차 홍콩에 머물던 배우 윌리엄 홀든 사건이다. 어느 날 저녁, 홀든이 지미스 키친에서 주방장의 특제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화재 경보가 갑자기 울렸다. 사이렌 소리에 놀란 손님과 직원 모두 도로로 대피했다. “불길이 번질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윌리엄 홀든은 손에서 어니언 수프 그릇과 스푼을 절대 놓지 않았다. 그는 거리 한복판에 서서 느긋하게 어니언 수프를 마지막 스푼까지 싹싹 비웠다.”(레오 랜다우 회고록 중에서) 지미스 키친이 한 세기 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핵심 비결은 정통 서양 요리에 동양적 요소가 오묘하게 결합된 메뉴에 있다. ‘지미스 마드라스 커리(Madras Curry)’는 세대를 뛰어넘어 가장 사랑받는 대표 메뉴다. 1940년대 이 식당의 인도계 요리사들이 해 먹던 스태프밀(Staff Meal·직원 식사)에서 비롯됐다. 우연히 맛본 창업자 아내의 강력 추천으로 정식 메뉴로 등극했다. ‘치킨 수프림 키예프(Chicken Supreme Kiev)’는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 러시아 셰프들에게 전수받은 레시피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두툼한 닭가슴살 속에 마늘과 허브 버터 패티를 넣고 바삭하게 굽는다. 칼을 대는 순간 가슴살에서 풍부한 버터 즙이 흘러나온다. ‘비프 스트로가노프(Beef Stroganoff)’ 는 제정 러시아의 고풍스러운 요리다. 소고기 안심과 양송이버섯, 사워크림을 곁들여 고소함과 깊은 풍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베이크드 알래스카(Baked Alaska)’는 식사를 마무리하는 화려한 디저트다. 아이스크림과 스펀지케이크를 폭신한 머랭으로 감싼 뒤, 웨이터가 테이블 옆에서 브랜디에 불을 붙여 푸른 불꽃을 피워 올리는 플람베(flambé) 퍼포먼스가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사로잡는다. 이 밖에 과거 테이블마다 기본으로 무제한 제공되던 ‘양파 피클(Pickled Onions)’과 러시아식 비트 수프 ‘보르시(Borscht)’, 영국 전통 일요일 특식 ‘선데이 로스트(Sunday Roast)’는 고향을 떠나 낯선 동양 땅에 온 서양인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음식이었다. 2020년 지미스 키친이 문을 닫았을 때, 많은 현지인이 “홍콩의 한 시대가 끝났다”며 슬퍼했다. 하지만 지미스 키친은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외식 기업 ‘에피큐리언 그룹’ 지휘 아래 2024년 홍콩 센트럴의 유서 깊은 페더 빌딩 M층에 화려하게 둥지를 틀었다. 새로 문을 연 식당의 인테리어는 호주의 세계적인 디자인 스튜디오 ‘루케티 크렐(Luchetti Krelle)’이 맡아 과거의 유산과 현대적 미감을 조화시켰다. 은은한 놋쇠 장식과 깊은 색감의 목재 패널, 고급스러운 대리석 상판으로 마감된 칵테일 바가 손님을 맞는다. 메인 다이닝 룸은 은은한 주황빛 조명과 클래식한 벨벳 소파 좌석, 100년 역사를 담은 흑백 사진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한 세기 전 홍콩의 럭셔리한 살롱에 입장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총괄 셰프 러셀 독트로브(Doctrove)가 이끄는 주방은 전통 레시피를 엄격히 지키면서도 한층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대표 메뉴인 마드라스 커리는 현대적 감각의 처트니(Chutney)와 향긋한 바스마티 쌀밥과 함께 제공되고, 치킨 수프림 키예프는 겉은 더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새롭게 선보인 시그니처 칵테일 ‘보르시 메리(Borscht Mary)’는 이곳의 대표 수프인 보르시에서 영감을 받아 창조됐다. 구운 채소의 풍미를 배어들게 한 보드카에 비트루트와 매콤한 토마토 믹스를 더해, 고전적인 블러디 메리 칵테일에 지미스 키친만의 맛을 위트 있게 녹여냈다. 페더 빌딩 아치형 창문 아래서 보르시 메리 한 잔을 기울이며 마드라스 커리와 치킨 키예프를 나누는 순간, 손님들은 100년 전 상하이 황푸강 선창가와 식민지 시절 홍콩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가올 또 다른 100년을 함께 맛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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